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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움은 나의 저주다“ 와이파이 기술의 시작, 헤디 라마르

by 너굴이여행 2018. 9.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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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사진으로 보시다시피 헤디 라마르는 정말로 아름다운 여배우였습니다. 170cm의 큰 키에 아름다운 미모를 지닌 이 여인은 오스트리아에서 1914년 출생하였죠. 그녀의 집안은 꽤나 부유했습니다. 아버지는 은행가였고 어머니는 피아니스트였죠



▶그녀의 나이 18세에는 체코의 영화인 '엑스터시'에 출현했는데 이때의 연기는 그녀를 세계에 알렸죠. 그 당시의 오르가즘 연기와 숲속을 누드로 달리던 신은 포르노 영화가 아닌 장르에서는 최초의 시도였으며 꽤 큰 돌풍을 일으켰습니다.

 

19세 그녀는 남편인 프리드리히 만들과 결혼했습니다. 그는 13살이나 나이가 많았고, 무기를 팔아먹는 무기상이었죠. 그러므로 그의 집은 과학자나 기업가들이 자주 찾았다고 하네요. 이때 그녀는 그들과 많은 교류를 했다고 합니다. 보기와는 다르게 조용하고 지적인 면이 많은 여인이었다고 전해집니다. 사실 그녀의 남편은 그녀의 배우 생활을 탐탁치 않게 여겼고 연기에 관한 관심을 돌리기 위해서 그런 모임에 아내가 참석하는데 꽤 적극적이었다고 하네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무기상이었던 만들은 히틀러의 나치즘과 무솔리니의 파시즘 사상에 동조되었다고 합니다. 헤디는 나치즘, 파시즘을 경멸하였죠. 결국 그녀는 파리로 도주하고 그와 이혼하게 됩니다. 그 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헤디 라마르'로 개명하였죠.

 

낮에는 배우, 밤에는 공학도


미국에서 그녀는 새로운 섹스심벌로 탄탄대로를 달렸습니다. 피카소, 찰리 채플린, 클라크 게이블 등의 셀렙들과 교류를 하였죠. 밤에는 혼자 방에 앉아 발명하던 어느 날 그녀는 영국의 여객선인 독일 유보트의 어뢰를 맞아 침몰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리고 그 여객선에는 많은 어린이도 피난길에 있었죠.

 


그녀는 이때부터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을 도울 방법을 찾기 시작했고, 무선조종 어뢰 개발 탐구의 보안 분야를 탐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친구였던 작곡가 조지 앤틸과 함께 피아노의 공명원리를 모티브로 한 통신개념을 창안하였습니다. 이는 항공모함과 어뢰가 주파수를 바꿔가며 통신을 하는 개념이었죠.

 


이는 주파수 도악(FHHS)라고 불렸고 1942년 미국에서 특허 신청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적국인 오스트리아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특허 자격은 몰수당하였고, 헤디는 미 해군에 이 기술을 기증했지만, 군에서도 기술이 어뢰 구조상 맞지 않는다며 반려하였죠



▶하지만 1950년 트랜지스터의 발명과 함께 그녀의 기술은 다시금 시선을 끌었고, 휴대폰, 와이파이, 블루트스로 이어지는 CDMA(부호분할다중접속) 기술로 발전했죠. 하지만 그녀의 특허는 이미 만료되었기 때문에 아무런 금전적인 이득은 얻지 못했다고 합니다.

 


1956년 이후 그녀는 이렇다 할 작품에 출연하지 못하며 커리어에서도 내리막길을 걸었습니다.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며 총 6번의 이혼을 하였고 1965년과 1991년에는 절도 미수 사건으로 이미지도 깎였죠. 1965년의 절도 사건은 앤디 워홀의 영화로도 만들어졌습니다.


 


1997년 헤디와 엔틸은 주파수 도약의 발명이 인정받아서 미국 전자 개척 재단으로부터 상을 받았습니다. 또한, 할리우드 명예의 전당에도 이름이 올라갔죠. 2000년 플로리다에서 사망하였습니다.

 


2015년 구글에서는 헤디 라마르의 탄생 101주년을 맞이해서 그녀의 헌전 형상을 발표했습니다. 그곳에는 이렇게 적혀져 있었죠

No Hedy Lamarr, No Google (헤디 라마르가 없으면 구글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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