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잠재력은 갈리아를 정복한 카이사르부터 알아줬죠. 실제로 로마는 게르만족에게 망하지만, 항상 게르만족을 견제해온 로마제국이었습니다. 그 이후 2000년간 유럽의 패권은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가 거머쥐고 있었지만, 이들 나라는 독일의 통일을 항상 막아왔죠.
전범 국가인 독일의 강력한 민족주의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독일은 2000여년간 나라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쪼개진 나라였기 때문이죠. 프로이센, 바이에른, 작센 등 공국으로 갈라진 독일을 통일하려고 시도할 때마다 전 유럽이 덤벼들었죠. 이런 상태에서 1871년 1월 독일 제국이 탄생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강대국을 향한 야망을 키우게 되죠. 당시의 강대국이란 많은 식민지와 풍부한 자원을 의미했습니다. 없는 것은 과학기술과 화학으로 만들어 내겠다는 생각이었죠. 독일이 호시탐탐 노렸던 곳은 우크라이나였죠. 우크라이나는 밀, 옥수수, 해바라기 등 농작물 등은 물론 석탄, 철광석, 망간, 우라늄, 석회석 등 풍부한 지하자원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당시 독일 제국의 고민은 프랑스를 치면 러시아가 침공할 것이고, 러시아를 치면 프랑스가 침공할 것이라는 점이었습니다. 러시아와 프랑스는 세계 최강의 육군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바다는 당시 세계 최강의 해군 국가인 대영제국이 있었죠. 이 첩첩산중에서 독일은 자원마저 없었죠. 그러므로 항상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며 준비를 해왔죠. 언제가 다가올 전쟁을 말이죠.
당시 독일은 화약 만들 재료마저 없어서 독일은 공기 중의 질소로 화학 재료인 질산염을 만드는 기술까지 개발했죠. 그렇게 처절하게 준비했던 독일이었습니다.
그런 독일의 잠재력과 무서움을 알았던 영국, 러시아, 프랑스는 일찍이 삼국협상으로 편을 이루고 있었고 이에 대응해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도 침략을 당하면 서로 간에 군사원조를 한다는 안전보장 체제인 삼국동맹(1882)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삼국협상(영국-러시아-프랑스)과 삼국동맹(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은 전쟁하기 위한 조약은 아니었습니다. 전쟁 방어 장치로서 작동해왔던 것이죠. 하지만 사라예보 황태자 부부 암살사건은 방어 장치로 만들어졌던 삼국협상과 삼국동맹의 도화선이 되었죠, 오스트리아는 황태자 부부 피살 사건으로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합니다(1914.7.28.).
세르비아의 후원국이었던 러시아는 즉시 총동원령을 선포했고 독일은 이를 해제하라 했지만, 러시아는 이를 거부했죠. 그리고 독일은 삼국동맹에 따라 오스트리아를 지원하기 위해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합니다.(1914.8.2.) 그리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선전포고가 이어졌죠. 결과적으로 전쟁의 초반 양상은 연합국인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러시아, 일본, (추후 미국) 대 동맹국인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만 제국, 불가리아)로 확대되었습니다.
사실은 제일 처음에는 이 전쟁에 대해서 낙관적이었습니다. 누구도 이 전쟁이 4년이나 갈 줄 몰랐죠. 길어야 2~3개월 정도면 끝날 줄 알았던 전쟁이었습니다. 많은 국가에서 젊은이들이 전쟁에 지원했는데 만면에 웃음을 띠고 지원했다고 하네요. 마치 보이스카우트 가듯이 말이죠. 연합국 측에서는 당연히 (쉽게) 이기리라 생각했던 전쟁이었죠. 반면에 독일 같은 경우에는 굉장히 치밀하게 전쟁을 준비했습니다. 당시의 독일 참모총장이었던 슐리펜은 슌리펜 계획을 세우는데요.
슐리펜계획은 독일의 지정학적 위치상 서부전선과 동부전선 등 양면 전쟁을 해야만 했죠. 슐리펜계획은 최소한의 병력으로 러시아군을 막고 모든 병력을 서부전선에 몰방하는 계획이었죠. 또한 군을 좌익과 우익으로 나누어 우측의 87%에 해당하는 병력이 벨기에를 통과해 프랑스를 침공하려는 계획이었죠.
"슐리펜 계획은 약간 모아니면 도였던 것 같습니다." - 이세환 기자.
1차 대전 직전 슐리펜은 참모총장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그 후임은 몰트케였죠. 슐리펜에 비해 조금은 소극적인 몰트케는 병력의 배분은 7:3로 바꿉니다. 왜냐하면 슐리펜 계획대로 한다면 독일 영토 일부를 내어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게 싫었던 몰트케는 좌우 병력 배치 비율을 슐리펜과는 정반대인 7:3으로 바꾸게 된 것이죠.
슐리펜의 전쟁 철학은 "내가 원하는 곳에서 적을 격파한다" 였지만 몰트케의 전쟁 철학은 "적을 발견한 곳에서 적을 격파한다" 였죠. 전쟁의 주도권을 내준 셈이었습니다. 역사가들은 슐리펜 계획의 수정이 전쟁이 장기화된 이유이며 가장 큰 패인이라고 봅니다.
이제 1부의 절반 정도만 리뷰하였네요. 다음 시간에 찾아뵙겠습니다.
*사진에 오타가 있습니다. 슐리켄 계획이 아닌 슐리펜 계획입니다.
'여행 및 문화 > 문화 및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도네시아 소년 49일간 바다를 표류 중 구조된 스토리 (0) | 2018.10.01 |
---|---|
팝콘의 역사는 5000년! 팝콘에 관한 흥미로운 5가지 사실. (0) | 2018.09.30 |
국방티비 토크멘터리 전쟁사 제1차 세계대전, 전쟁의 서막 (0) | 2018.09.29 |
조선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지면? 검안과 형정도첩, 차이나는 클라스 78회 리뷰 1탄_김훈 교수 (0) | 2018.09.23 |
세계테마기행 멕시코 테우티우아칸(테우티후아칸) (0) | 2018.09.13 |
댓글